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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마도 니나호 여행-1

배디링 2018. 12. 10. 10:29

11/29<1일차> : 부산-대마도 히타카츠항-점심-구스보만 만제키바시-나카라이토스이 기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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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호텔에서 면요리 점심-미우다 해수욕장 -생활광장 면세점 쇼핑-히다카츠항 출발-부산 도착





























































































대마도 지도



...........쓰시마(對馬 (つしま) 츠시마. 쯔시마)...............

'한반도규슈 사이' 대한해협 중간지점 일본

삼국시대 초에는 쓰시마를 ‘진도(津島)’라고 불렀다.

고려 말부터 고려에 조공하고 쌀 등 답례를 받아갔다.


6세기전반 아스카 시대에는 쓰시마 국주(對馬島主)가

일본왕부의 임명장을 받기도 하여 이런 관계를 바탕으로

평화 시에는 한반도와 일본 열도 간의 교역을 독점하였으며,

전쟁 시에는 한일 두 나라 사이의 징검다리 역할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곳이 한때 왜구의 소굴이 되자,

1389년(고려 창왕 2년) 박위가 쓰시마 토벌.


본래 쓰시마는 아비루 가문이 지배했으나,

12세기 고레무네노 시게히사(惟宗重尙)가

아비루 가문에서 일어난 반란을 평정한 이후,

시게히사의 후손인 소 가문이 지배하게 되었다.


그뒤로도 고려와 조선으로부터 관작을 받았다.

쇼군으로부터 다이묘(大名)로 임명을 받는 등

조선과 일본 사이에서 양속관계를 유지하였다.


조선과 지리적으로 가까워 외교창구로 중요한 역할.

조선통신사가 일본을 방문때 가장 먼저 이곳에 도착.

조선은 왜구들에 대한 회유책으로 통상편의도 봐주고

조선 왕은 귀화 정책을 쓰는 등 우대를 해주기도 하였다.


그렇지만 이곳을 근거지로 한 왜구 행패가 여전하자

1419년 음력 6월 조선세종이종무에게 명을 내려

군사 1만 7285명을 동원해 대마도 원정 등 강경책을 썼다.


그러나 쓰시마 국주의 간청으로

왜인의 통상을 위하여 3포를 개항하고

그들의 편의를 도모했으며, 또한 조선의 국왕이

대마도주에게 관직을 내려 조선 영향력 아래 두었다.


그 후에도 조선에 근접한 왜구의 근거지로서,

이것을 무마하려는 한국의 해방정책(海防政策)

대마도는 조선으로부터 특수한 대접을 받아왔다.


그후에도 조선은 쓰시마에 대한 영향력을 오래 유지.

임진왜란 때 일본수군 근거지가 되며 차츰 영향력 약화.

에도 시대(江戸時代)에는 쓰시마 후추 번(對馬府中藩) 설치.


쓰시마 국주 소(宗) 가문이

일본의 쇼군(將軍)으로부터

다이묘((大名))로 임명 받았다.


메이지 유신(明治維新)을 계기로

1871년 폐번치현(廢藩置縣)으로 인하여

쓰시마에 이즈하라 현(嚴原縣)이 설치되었다.


1876년 나가사키 현에 편입되며,

소 가문은 화족으로 편입되었다.


대한제국 마지막 황녀인 덕혜옹주

일본제국 강요로 소백작가와 정략결혼.


쓰시마(대마도)는 원래 하나의 섬이었으나

1672년 21대 당주 '쓰시마 후추 번 3대 번주'

소 요시자네(宗義眞)때 작은 배가 아소만과

대마도 동부를 왕래할 수 있도록 오후나고시

大船越 운하를 만들어 두 개의 섬으로 나뉘었다.


1900년 일본 제국 해군러일 전쟁 준비과정에서

아소만(浅茅湾)에 있는 군함을 쓰시마 동쪽 해상으로

빨리 이동시키기 위해, 만제키세토 대운하를 만들었다.


만제키세토는 쓰시마 섬을 위 아래로 나누는 경계로,

쓰시마 북부는 "가미시마(上島)" 남부 "시모시마(下島)".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 이승만은 정부 수립 직후인

1948년 8월 18일 성명에서 "'대마도는 우리 땅'이니

일본은 속히 반환하라."고 했으며 일본이 항의하자

이승만은 1948년 9월 '대마도 속령에 관한 성명 발표.


또한 1949년 1월 7일에도, 같은 주장을 하였다.

1951년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초안을 작성할때

4월 27일 미국 국무부에 보낸 문서에서 대마도의

영유권을 돌려받아야 한다는 요구를 한 적이 있다.


그러나, 미국은 이러한 요구를 거부.

2013년 3월 22일에는 의정부시의회

대마도 반환을 촉구하는 한편 대한민국

정부차원의 반환 촉구를 요청하고 있다.


최근에는 일본의 한 언론에서 "한국이 쓰시마를 넘본다"

라는 기사를 써서 영토분쟁화될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다.

산케이 신문은 "쓰시마가 위험하다" 쓰시마 위기론 기사화.


2008년 일본 정부가 중학 교과서에

독도 관련한 자국 영토 주장을 하자

대한민국에서는 이를 상대하기 위한

쓰시마 섬의 영유권 주장을 언급했다.


집권 여당인 한나라당 최고위원 허태열

2008년 7월 16일 한나라당 지도부 회의에서

이승만 대통령 영유권 주장 예와 B형간염유전자

유사성을 예로 들며 쓰시마 섬의 영유권 주장을 역설.

.

2010년 9월 28일 대한민국 국회에서

여야 37명 의원들은 대마도 포럼 창립.

허태열 한나라당 의원은 이날 포럼 창립식에서

"대마도는 역사적, 문화적, 인종적으로 우리 영토"

"대마도에 대한 우리의 관심은 초대 제헌국회에서의

영유권 주장과 샌프란시스코 강화회의에서의 반환 요구

이후로 사실상 전무한 상태로 현재까지 이르러왔다" 지적.


여야 의원들은 일본이 불법으로 강점하고 있는

대마도를 조속히 반환해야 한다는 것이 골자다.


실제 대마도는 지리적으로 한국에 가깝고

대마도 주민의 혈통조사에서도 한국 혈통과

일치한다며 대마도 영유권 주장의 활성화에

이바지하겠다는 내용을 설립 목적에 밝혔다.


포럼 소속 의원들은 향후 활동과 관련,

매년 상반기(3월)와 하반기(11월)로 나눠

정책세미나를 개최하는 것은 물론 결의안

채택과 국민운동대회를 개최하기로 했다.

....................................................... 

대마도는 우리 땅이라는 옛기록에 적지 않게 보인다.

조선 태종때 여변갑 이라는 사람이 쓴.,'정대마도교서.'

조선 세종때 변계량 이라는 사람이 쓴.,'유대마주서' 기록.

 

대마도는 본디 우리 땅이었음을 밝혀 놓고 있으며,

성종때 '동국여지승람'에도 "대마도는 본래 우리 땅인데

언제 어떻게 왜인들이 들어와 살게 되었는지 알 수 없다."

 

지금으로부터 약 700년전(고려 원종 16년) 여-몽연합군.

"33,000명은 전함900여척으로 일본을 칠 때 먼저 대마도와

일기도 등을 쳐서 무찔렀다." 하니, 이때 왜인이 점유한 흔적.

 

지금으로부터 1100년전 신라 상인의 기록과

1400년전 백제의 비구니 법명이 대마도에.,'오음.'

 

그당시 불경을 전했다는 당시의 흔적을 더듬어 보면,

이 시기부터 왜인들이 우리 겨레와 섞여 살기 시작한듯.

대마도 원주민이었던 우리겨례가 지어 부른 지명은.,'두셤.'

 

대마도가 조선의 영토라는 증거는

영국 '에딘바라 지리학 연구소' 세계지도.

프랑스 ′라루스′ <세계정치경제지도 :1950년도 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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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마도는.,3세기 '위지' 왜인전의 기록처럼
산세가 험하여 깊은 숲이 많았고, 길은 거의 없어
새나 사슴이 겨우 다닐 정도라 전답이 드문 자연환경.

2015년 현재 인구., 약 3만 7천명 정도.
대마도는 우리나라 남단에서 약 53km 떨어진 위치,
일본 큐슈 본도에서 제일 가까운 나고야에서 147km
일본보다는 우리나라에 더 가까운 해상에 떠 있는 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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