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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 유적

배디링 2019. 1. 1. 19:33

1> 김포공항 도착, 렌트카 인수- 김포 경유 강화초지대교 도착 - 초지진 - 마니산  함허동천, 정수사<전등사> 도착- 동막해수욕장-점심․더착한마니산 짜장 양도면 능내리 901-5 032-937-8249 = 아르고빌 카페<뷰나인 아임파인 카페>-외포리 삼별초호국비(망양돈대)-젓갈시장-장화리 일몰 감상- 화도면 내리 벧엘펜션 숙소 도착 = 저녁식사 <후포 연백호>


2> 아침식사-돌하르방- 석모도 <자연휴양림(전망 카페)-보문사-마애석불, 눈썹바위, 리안월드온천 족욕)-외포젓갈시장-점심<호산정>-고려산 적석사 낙조대 -고려저수지 산책로-아르고빌 카페-저녁<외포 갯장어, 뷰나인 식당>


3> 아침식사-교동도(교동마을, 교동향교, 읍성, 화개사, 화개산, 연산군 유배지)-대룡시장에서 점심 -평화전망대-고인돌 유적지, 역사박물관 탐방- 중앙시장, 강화풍물시장 쇼핑-갑곶진(강화역사관) 경유-공항으로



[강화도 여행] 강화도 역사 유적 한번에 정리하기(2019/1/1)


프로파일 

강화도는 우리나라에서 4번째(제주도-거제도-진도)로 큰 섬. 면적은 305.75㎢이고

해안선 길이는 106.5㎞

마니산(469m)

참성단(塹星壇,매년 10월 3일 단군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부근리 지석묘)

5진 7보 54돈대

강화 5진

월곶진,제물진,용진진,덕진진,초지진

강화 7보

광성보. 선두보, 장곶보, 정포보,인화보,철곶보,승천보

강화 54돈대

갑곶돈대, 계룡돈대, 덕진돈대, 택지돈대, 장곶돈대, 광성돈대, 선수돈대(송강돈대), 무태돈대, 좌강돈대, 초지돈대, 삼암돈대, 분오리돈대, 손돌목돈대, 가리산돈대, 걸곶돈대, 건평돈대, 검암돈대, 광암돈대, 굴암돈대, 귀등돈대, 낙성돈대, 동검돈대, 망양돈대, 망월돈대, 망해돈대, 미곶돈대, 북일곶돈대, 불장돈대, 빙현돈대, 섬암돈대, 석각돈대, 석우돈대, 숙룡돈대, 속우돈대, 송곶돈대, 양암돈대, 오두돈대, 염주돈대, 옥창돈대, 용강돈대, 월곶돈대, 의두돈대, 인화돈대, 작성돈대, 장자평돈대, 적북돈대, 제승돈대, 천진돈대, 철북돈대, 추루돈대, 화도돈대, 후애돈대, 휴암돈대

호국돈대길(17km)

초지진 – 덕진진 – 광성보 – 갑곶돈대 – 강화역사박물관

강화해협을 지키는 중요한 요새

광성보,덕진진, 초지진, 용해진, 문수산성

日 운양호 침공지, 초지진

강화 초지진은 해상으로부터 침입하는 적을 막기 위하여 구축한 요새로, 조선왕조실록이나 승정원일기에서 초지진 설치에 대한 기사에 따르면 조선 효종 6년(1655)에 설치된 것으로 보인다.1871년(고종 8) 미국이 1866년의 제너럴셔먼호 사건을 빌미로 조선을 개항시키려고 무력 침략해 왔을 때(신미양요) 전력의 열세로 패하여 점령당했다. 이 때 군기고, 화약창고 등 군사시설물이 모두 파괴됐다.

또 일본이 조선을 힘으로 개항시키기 위해서 파견했던 운양호의 침공은 고종 13년(1876)의 강압적인 강화도 수호조약으로 이어져 일본침략의 문호가 개방됐다.그 뒤 초지진은 허물어져 돈대의 터와 성의 기초만 남아 있었으나 1973년 복원했다. 

민족 시련의 역사적 현장이었던 이곳은 현재 호국정신의 교육장이 되도록 성곽을 보수하고 당시의 대포를 진열하고 있다. 

병인양요 때 승리를 거둔 덕진진

고려시대 강화해협을 지키는 외성의 요충으로서 원래 수영에 예속된 첨사의 진(鎭)이었다. 1677년 만호를 두고 군관 26명, 병 100명, 돈군 12명, 배 2척이 배치됐다. 1679년 축조된 용두, 덕진돈대 포좌 15문이 설치된 강화 제1의 포대인 남장포대와 대포 10문이 설치된 덕진포대가 이 진에 소속됐다.

1866년 병인양요 때는 양헌수 장군의 부대가 밤에 이 진을 통해 정족산성에 들어가 승리를 거두었고, 1871년 신미양요 때 미국의 아시아 함대와 가장 치열한 포격전을 전개해 미국 함대에 피해를 입히기도 했다. 당시 미군의 전사 속에 남북전쟁 때에도 이와 같이 짧은 시간에 맹렬한 포격전을 경험하지 못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신미양요 때 성첩과 문루가 모두 파괴됐지만 1977년에 복원하면서 남장포대에는 조선군이 사용하던 대포를 제작해 설치했다.

신미양요 어재연 장군의 순국지, 광성보

조선 광해군 10년(1618년)에 고려시대의 외성을 보수하고, 1656년 광성보를 설치했다. 이 보의 돈대는 1679년에 축조된 것이며 오두, 화도, 광성의 돈대와 오두정 포대가 이 보에 소속됐다. 1745년 완전한 석성으로 개축되어 당시 성문도 설치됐다.

광성보는 신미양요 당시 가장 격렬했던 격전지로 1871년 4월 24일 미국의 로저스가 통상을 요구하면서 함대를 이끌고 1230명의 병력으로 침공했을 때 상륙부대가 초지진, 덕진진을 점령한 후 광성보에 이르러 백병전을 전개했다. 당시 조선군 지휘관 어재연 장군 이하 전 용사가 열세한 무기로 용감하게 싸웠는데, 포탄이 떨어지면 칼과 창으로 싸우고 칼과 창이 부러지면 돌과 맨주먹으로 싸워 한 사람도 물러서지 않고 장렬히 순국했다고 한다. 

이 전투 후 성책과 문루가 파괴돼 폐허가 되었던 것을 1977년 안해루, 광성돈, 손돌목돈, 용두돈과 전사한 무명용사들의 묘, 그리고 어재연 장군의 쌍충비각 등이 모두 보수 정화됐으며, 이 때 세운 ‘강화 전적지 정화기념비’가 용두돈대 위에 서 있다.

1998년에는 해변 쪽으로 넓은 휴식공간을 조성해 관광객들에게 이용 편의를 제공할 수 있게 됐다.

광성보는 현재 사적 제 227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매년 음력 4월 24일에는 어재연 장군을 비롯하여 장렬하게 전사한 무명용사들에 대한 광성제가 봉행된다. 이 광성보는 당시에 사용한 대포와 포대, 성이 잘 남아 있다. 

병인양요 프랑스군의 상륙지 갑곶돈대

갑곶돈은 고려가 1232년부터 1270년까지 도읍을 강화도로 옮겨 몽고와의 전쟁에서 강화해협을 지키던 중요한 요새로, 대포 8문이 배치된 포대이며, 돈대는 작은 규모의 보루를 만들고 대포를 배치하여 지키는 곳이다.

삼국시대 강화를 갑비고차(甲比古次)라 부른데서 갑곶이라 이름이 전해오는 것으로 보기도 하고, 고려 때 몽고군이 이곳을 건너려고 하다 뜻을 이루지 못하고 안타까워하며 ‘우리 군사들이 갑옷만 벗어서 바다를 메워도 건너갈 수 있을 텐데’라 한탄했다는 말에서 유래했다는 전설도 있다.

갑곶돈대는 고려 고종 19년(1232)부터 원종 11년(1270)까지 도읍을 강화도로 옮긴 후 조선 인조 22년(1644)에 설치된 제물진(갑곶진)에 소속된 돈대로 숙종 5년(1679)에 축조됐다.

고종 3년(1866) 9월 병인양요 때 프랑스의 극동 함대가 600여명의 병력을 이끌고 이곳으로 상륙해 강화성과 문수산성을 점령했다. 그러나 10월에 정족산성에서 프랑스군은 양헌수 장군의 부대에게 패해 달아났다. 1977년에 옛터에 새로이 옛 모습을 되살려 보수, 복원이 이루어졌다. 지금 돈대 안에 전시된 대포는 조선시대 것으로 바다를 통해 침입하는 왜적의 선박을 포격하던 것이다. 

강화역사박물관

강화역사박물관은 강화의 문화유산을 보존·연구하여 전시할 목적으로 세워진 공립박물관이다. 갑곶돈대 옆에 위치해 있다가 지난 2010년 고인돌공원으로 확장 이전했다. 상설전시실에는 강화의 선사시대 유적지와 고려왕릉에서 출토 된 유물과 향교, 전통사찰 소장품 등의 문화재가 전시돼 있으며, 기획전시실에서는 해마다 다채로운 주제의 특별전이 열리고 있다. 그리고 강화 역사의 이해를 돕기 위해 영상실과 교육프로그램을 함께 운영하고 있어 복합문화공간으로서 역할을 하고 있다.

박물관 2층은 구석기부터 청동기에 이르는 선사시대 유물을 전시하고 있다. 신나는 청동기시대 탐험과 강화의 열린 바닷길 이야기 등 강화의 역사를 체험해보고 익힐 수 있다. 이밖에 고려산 오련지, 전등사 나녀상, 손돌, 보문사 석실 나한상 등 강화에 전해 내려오는 다양한 이야기를 간략하게 구성해놓았다.

강화역사박물관 1층에서는 고려시대부터 조선시대에 이르는 다양한 유물과 역사적 사건들을 차례로 만날 수 있다. 조선시대 말엽 서구 열강의 빈번한 침략으로 강화도가 철저하게 유린된 병인양요, 신미양요, 강화도조약 등 역사적 사건들이 전시돼 있다. 병인양요 때 프랑스군이 강화성을 침략하는 장면, 신미양요 때 광성보에서 펼쳐진 미군과 조선 관군의 전투 장면을 재현한 디오라마를 통해 당시 상황을 조금이나마 짐작할 수 있다. 특히 신미양요를 재현한 디오라마에는 실물 크기의 수자기가 걸려 있다.

39년간 고려수도 ! 고려궁지

고려의 유적이 남한에선 유일하게 밀집되어 있는 곳도 바로 강화군이다. 무려 39년 간 고려의 도읍이었기 때문이다. 고려 고종(대한제국 고종황제가 아니다) 19년(1232년) 몽골군이 침입하자 고려 왕실은 전쟁을 결심하고 몽골군의 약점인 수전(水戰)에 대비해 개경으로부터 강화로 천도했다. 이름은 강도(江都). 원종 11년(1270년)까지 38년간 고려의 수도였다. 예성강, 임진강, 한강의 하구가 강화에서 모인다. 군사적 요충지다. 바다로부터 오는 적과 육지를 통해 공격하는 적에 맞서기 좋다.

강화천도는 당대 실세였던 최우가 주도했다. 성을 두르고 궁궐을 짓고 관아를 세웠다. 심지어 천도 20년 만에 국자감(대학)까지 들어섰다. 한국사에서 강화가 가장 주목받던 시절이었다. 고려 최씨 무신 세력과 귀족들은 새로 옮긴 도읍에서 떵떵거리며 살았다. 팔관회를 열었고 격구를 즐기는 등 호화롭게 지냈다.

원종은 원과 회의하며 개경으로 다시 돌아갈 것을 선포했지만, 삼별초(三別抄)는 왕명을 어기고 그대로 남아 원과 항전했다.

지금은 조선 동헌 건물과 외규장각이 덩그러니 남았다.

고려궁지 외규장각

강화 부근리 고인돌

고인돌은 큰 돌을 받치고 있는 ‘괸돌’ 또는 ‘고임돌’에서 유래하는데 지석묘(支石墓)라고도 부른다. 영어권에서는 돌멘(Dolmen)으로 통칭되는 고인돌은 이집트의 피라미드(Pyramid), 영국의 스톤헨지(Stonehenge), 프랑스 카르나크의 열석(列石·여러 개의 큰 돌을 줄지어 세운 것) 등과 같은 거석기념물(巨石紀念物)의 일종이다. 

고인돌은 대체로 기원전 1200∼200년 무렵의 청동기시대 사람들이 만들었던 무덤이다. 고인돌에서는 민무늬토기·간석기 등이 주로 출토된다. 

국내의 고인돌은 신석기시대부터 시작돼 청동기시대에 주로 만들어지다가 철기 시대에 사라진 것으로 보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인천 강화군, 전북 고창군, 전남 화순군에 집중적으로 분포하고 있다.

고인돌에는 지상에 책상처럼 세운 탁자식(북방식)과 큰 돌을 조그만 받침돌로 고이거나 판석만을 놓은 바둑판식(남방식)이 있다.

강화 부근리 고인돌(사적 제137호·사진)은 청동기시대에 조성된 우리나라 최대 규모의 탁자식 고인돌이다. 전체 높이는 2.6m이며, 덮개돌은 길이 6.5m, 너비 5.2m, 두께 1.2m의 화강암으로 돼 있다. 원래 네 개의 굄돌 위에 덮개돌이 올려져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현재는 두 개의 굄돌만이 남아 있는 상태다. 덮개돌의 무게는 약 80t에 달하며 고인돌 축조에 800명 이상이 동원됐을 것으로 인천시 역사자료관은 추정하고 있다. 

이 고인돌에 대한 발굴조사는 아직 이뤄지지 않았으나 인근 삼거리에 있는 고인돌에서 무문토기조각과 간돌검(마제석검), 돌가락바퀴(방추차)를 비롯한 유물들이 나온 것으로 미뤄 삼거리 유적과 비슷한 유물들이 들어 있을 것으로 짐작된다. 덮개돌과 받침돌이 온전히 보존돼 있으며, 사체를 넣고 막았던 판석은 남아 있지 않다. 그러면서도 형태가 웅장해 제단 기능을 했을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이 외에도 강화군에는 150여 기의 고인돌이 분포하고 있으며, 이 중 강화 부근리 고인돌 등 보존 상태가 좋은 70기의 고인돌은 지난 2000년 12월 고창, 화순의 고인돌과 함께 세계유산으로 등재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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