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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창간기념 특집 1|‘바위, 숲, 물의 산’ 월악산국립공원 | 입지조건과 문화] 신라 때 小祀로 국가제사 지낸 명산

    글· 최원석 경상대 교수    사진·김준영, C영상미디어      / 입력 : 2016.06.21 13:36 [560호] 2016.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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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월악산 지명 고려사에 첫 등장… 고대부터 조선까지 지정학적 요충지

    월악산(1,097m)을 중심으로 전개된 문화역사의 연쇄 고리를 푸는 열쇠는 산이 위치하고 있는 지리적 조건과 간선 교통로의 길목이라는 점에서 찾을 수 있다.

    신라에서 고려 말까지 월악산이 왜 나라의 명산으로 지정되어 제사의 대상이 되었는지, 조선 초부터는 나라의 명산 제사에서 왜 빠졌는지, 멀리 삼국시대부터 가까이로 한국전쟁까지 왜 월악산을 끼고 수많은 전투가 발생했으며, 덕주산성 등 여러 관방시설과 요새가 있는지, 신라왕조의 마지막을 한탄해 금강산에서 여생을 보냈다는 마의태자와 덕주공주의 전설과 지명, 역사유적 등이 왜 월악산에 나타나는지, 월악산의 주요 전통사찰이면서 독특한 가람의 형식을 하고 있는 미륵대원지(미륵리사지)가 하늘재(계립령) 초입에 자리 잡고 있는 이유는 무엇인지 등을 곰곰이 따져 보면, 바로 월악산이 고대에서부터 고려와 조선 초에 이르기까지 지정학적인 요충지이자 한반도의 중부와 영남을 이어 주는 교통로의 요지였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고려 때 몽골 침입했을 때 격전지

    월악산의 고갯길 하늘재는 156년에 일찍이 개척됐다. 그곳은 국토의 허리를 통과하는 길목이었으며, 고구려와 신라 사이의 전략적 요해처이기도 했다. 고려시대에는 국토의 간선도로망이 체계화되어 개성을 중심으로 X자형을 이루었는데, 개성에서 동남쪽의 영남지방으로 향하는 길이 가장 중요했다. 거기서 하늘재는 백두대간을 넘어서 영남을 잇는 가장 중요한 통로였다. 하늘재는 고려 말까지 중요한 교통로 역할을 했으나 조선 초에 새재(조령)가 공식적인 길로 새로 개발됨에 따라 쇠퇴하게 된다.

    [창간기념 특집 1|‘바위, 숲, 물의 산’ 월악산국립공원 | 입지조건과 문화]
    문경새재길을 걷는 사람들. 세월이 변하며 고갯길이 관광지가 되었다.
    월악산을 대표하는 사찰이었던 충주 미륵대원지(彌勒大院址, 옛 명칭은 중원 미륵리사지)는 하늘재로 인해서 생긴 사찰이자 숙박시설(院)이었다. 절은 하늘재로 넘어가기 직전의 길목 한편에 자리 잡고 있다. 미륵대원이라는 이름에서도 짐작할 수 있듯이 사찰과 원(院)의 기능을 겸했다. 원은 여행자의 편의를 제공하는 일종의 숙박시설이다. 미륵대원이 고려시대와 조선 초까지 번창했지만 이후로 폐사지로 남은 이유도 교통지리적 조건과 관련해서 이해할 수 있다. 조선 초 인근에 새재가 새로 개척되면서 하늘재의 고개 역할이 쇠락했기 때문이다.

    월악산 동쪽의 월악리에 있는 신륵사(神勒寺)도 그 이름부터 예사롭지 않다. 신륵은 미륵(彌勒)이라는 불교적 의미로도 해석할 수 있지만, 글자의 뜻대로 해석하면 신력의 힘으로 채운 굴레 혹은 재갈이 된다. 절 이름에서 전략적 요충지에 대한 군사방어적 상징성과 호국의 염원이 들어가 있는 것이다.

    고대에 사찰은 종교적 기능뿐만 아니라 정치적, 군사적 역할도 겸했다는 사실을 돌이켜보면 왜 신륵사가 거기에 들어섰고 그 이름을 가졌는지 짐작할 수 있다. 추정컨대 신륵사는 신라시기의 창건 당시에 나라의 요새지를 수호하고자 한 진호사찰(鎭護寺刹)의 성격을 띠고 있는 것이다. 고려시대에는 이러한 진호사찰이 국가의 비보사찰(裨補寺刹)로 이어졌다. 신륵사의 경내에는 국사당(國祀堂)이라는 특이한 전각이 있다. 고대부터 월악산의 제의 장소였던 월악신사(月嶽神祀)가 폐허화되자 이곳으로 옮긴 것이다.

    [창간기념 특집 1|‘바위, 숲, 물의 산’ 월악산국립공원 | 입지조건과 문화]
    보물 제406호로 지정된 덕주사 마애불.
    지리적으로 월악산은 백두대간의 허리에 자리 잡고 있으면서, 위로는 소백산과 아래로는 속리산 가운데에 위치해 둘을 이어주는 연결고리가 된다. 월악산이 지닌 천연의 요새지라는 지형적 특성과 지정학적 위치의 중요성으로 말미암아 이 일대는 고려 때 몽골이 침략했을 당시 격전지이기도 했고, 동학농민전쟁의 농민군과 의병대장 의암 유인석(1842-1915)이 이끄는 제천의병군의 근거지였으며, 한국전쟁 때에는 빨치산의 저항지가 되었다.

    이러한 월악산권역이 갖는 전략적 가치를 조선 후기의 이중환도 <택리지> (1751)에서 잘 지적하고 있다. 월악산권 고을인 청풍(淸風 : 현 제천시 청풍면)을 일러 말하기를, “경상도에서 서울로 가는 길이, 좌도에서는 죽령을 지나서 이 읍에 통하고, 우도에서는 조령을 지나서 읍에 통한다. 두 고개의 길이 모두 이 읍에 모여서, 물길 또는 육로로 한양에 통한다. 고을이 경기도와 경남이 왕래하는 길의 요충에 해당하므로 유사시에는 반드시 서로 점령하려는 곳이 될 것이다”라고 했다.

    그렇다면 월악산이 지리적 조건으로 말미암아 명산이 될 수 있었던 역사적 배경과 나라의 명산제의는 어떻게 관련지어 이해될 수 있을까? 현재의 월악산이라는 이름은 <고려사>에서 나타난다. 1254년(고종 41) 12월에, ‘월악산 신령이 큰 위력을 나타내고 도왔다’는 대목이 있다. 그런데 월악산의 옛 이름이 월형산(月兄山)이었음은 <삼국사기>에 ‘내토군(奈吐郡)의 월형산(月兄山)에 소사(小祀)를 지냈다’는 대목에서 확인된다. 이로써 월악산은 신라시대 때부터 이미 나라에서 제사를 지낸 명산이었음을 알 수 있다.

    [창간기념 특집 1|‘바위, 숲, 물의 산’ 월악산국립공원 | 입지조건과 문화]
    덕주산성 동문 옆을 지나는 등산객들.
    고대의 명산제의는 나라의 운명이 산천의 힘에 영향 받는다는 산악신앙에서 발로된 것이었다. <삼국사기>에는 ‘삼산・오악 이하 명산대천을 나누어 대・중・소사로 한다’고 명산의 제사 사실을 기록했다. 신라는 왕도인 경주를 중심으로 영토 안에 여러 명산을 지정해 국토를 수호하고자 했다. 지배권력층은 지리적인 요처와 지정학적 요충지의 명산에 의례를 행함으로써 왕권의 상징적 강화를 꾀한 것이다. 명산과 명산제의는 왕조와 정치적, 공간적 속성이 맞물려 있기에 시대 정황에 따라 달리 지정되거나 혁파되기도 했다.

    신라에 이어 고려에서도 나라의 존위에 대한 산천의 음덕과 함께 월악산의 신령함에 대한 믿음은 변함없이 이어져 왔다.

    <고려사>에서 적고 있듯이, ‘300여 년 동안에 재변이 자주 일어났으나 즉시 평정할 수 있었던 것은 완전히 우리 산천 신령들의 한결같은 음덕으로 사직을 보호해 주었기 때문이었다’는 것이다. 덧붙여 월악산신의 힘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나라의 큰 재난이었던 몽골의 침략을 받았지만 월악산 신령이 큰 위력을 나타내고 도와주어 성을 지켜 낼 수 있었고, 마침내 만세의 공적을 이루어 놓았다.’(세가 제24, 고종3)

    같은 자료에는 ‘1255년(고종 42) 겨울 10월 을축일에 몽골 군사가 대원령(大院嶺 : 계립령, 현 하늘재)을 넘어왔다. 충주에서 정예 군사를 출동시켜 1,000여 명의 적을 죽였다’고 적고 있으며, 이듬해에 월악산성과 월악산 신사에서 벌어졌던 일에 대해서는 아래와 같이 생생한 서술을 하고 있다.

    ‘몽골 군사가 충주에 들어와서 성을 무찌르고 또 산성을 치자 관리와 노약자들은 겁이 나서 항거하지 못하고 월악산 신사로 올라갔다. 이때에 갑자기 구름과 안개가 끼면서 바람이 불고 비가 내리며 뇌성이 들리고 우박이 동시에 쏟아지니, 몽골군은 우리에게 산신령의 도움이 있다 하여 공격을 하지 못하고 물러갔다.’

    그런데 조선 초기를 지나면서 월악산의 명산 가치는 낮아졌고 국가적인 명산의 위상도 변했다. 그 주된 이유는 월악산을 끼고 있었던 하늘재가 인근에 새재가 새로 생기면서 고갯길로서의 주된 역할이 쇠퇴했기 때문이다. 이런 교통지리적 사정의 변화는 월악산에 대한 나라 제사에서도 연동되어 반영됐다.

    [창간기념 특집 1|‘바위, 숲, 물의 산’ 월악산국립공원 | 입지조건과 문화]
    보수공사가 진행 중인 미륵대원지 전경.
    조선 초기에 국가적 명산제의의 정황을 알 수 있는 문헌으로서 <세종실록> 오례가 있다. 거기에 당시 중사와 소사의 대상으로 기재된 17개의 명산에 월악산은 빠져 있는 것이다. 월악산 대신에 인근의 죽령산(단양)과 주흘산(문경)이 지정됐다. 달라진 길이 명산을 바꾼 것이다.

    명산에 대한 국가의 제의뿐만 아니다. 조선 중기에 와서는 고을의 진산(鎭山)에서도 월악산은 빠졌다. 고려시대부터 각 고을에서 랜드마크가 되는 주요한 산 하나를 진산 혹은 명산으로 지정하는 전통이 있었다. 월악산도 신라 때부터 조선 초까지는 청풍 고을의 진산 혹은 명산으로 지정되어 내려왔던 것으로 보인다. 그 문헌적인 증거는 <세종실록지리지>(1454)에 충청도 청풍의 명산으로 ‘월악’이라고 기재된 사실을 들 수 있다. ‘고을 남쪽 50리에 있다’고 산의 위치와 거리 관계도 적어 놓았다.

    그러나 조선 중기에 가서 청풍 고을의 진산은 읍치(邑治)에 바로 붙어 있는 인지산으로 바뀌었다. 진산이 새로 지정된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관찬지리지인 <신증동국여지승람>(1530)에서 확인된다.

    왜 청풍 고을에서는 월악산에서 인지산으로 새로 진산을 바꾸었을까? 그 배경은 조선 중·후기에 사회담론으로 성행했던 풍수라는 문화적인 요인에서 찾을 수 있다. 당시에 청풍의 월악산뿐만 아니라 타 지역에서도 새로 진산이 지정되는 경우를 흔히 찾아볼 수 있다. 개성의 송악(원래는 성거산이 진산), 강화의 고려산(원래는 마리산이 진산), 공주의 공산(원래는 계룡산이 진산) 등도 그렇다.

    새로 지정된 진산들은 모두 지리적인 공통점이 있다. 읍치의 맥을 대는 관아 뒷산이자 풍수적인 주산(主山)에 해당한다는 것이다. 굳이 명산의 품격을 갖추지 않았더라도 진산으로 지정될 수 있었던 것은, 그만큼 사회적으로 풍수담론이 성행하면서 주산이 갖는 가치 인식이 높아졌다는 것을 반영한다.

    명산의 역사는 사람의 역사

    [창간기념 특집 1|‘바위, 숲, 물의 산’ 월악산국립공원 | 입지조건과 문화]
    하늘재 정상에 세운 표지석.
    그러나 월악산에 기대어 살면서 삶터를 일구었던 민중들은 국가와 고을에서의 월악산에 대한 평가절하에 아랑곳하지 않았다. 월악산의 신령함에 대한 굳건한 믿음은 계속됐고, 그것은 월악산 산신제로 면면히 이어져 내려왔다. 송계리(제천시 한수면) 주민들은 마을에 월악산신당을 짓고 매년 음력 정월과 시월에 산신제를 지냈다. 월악산신제는 일제강점기에 중단되기도 했지만 마을제사(동제)로서 명맥을 유지했다. 제사를 올릴 때는 ‘월악산 산신령 대 신위(月岳山山神靈大神位)’라고 쓴 위패를 모신다고 한다(<한국민속신앙사전>(마을신앙 편, 2009, 국립민속박물관).

    이렇듯 월악산을 둘러싸고 역사적으로 전개되었던 명산문화는 옛사람들이 월악산과 관계 맺었던 지정학적 여건, 도로교통의 조건, 지리적 문화전통 등과 긴밀한 연관 관계를 맺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래서 한국에서 명산의 역사를 뒤집어 보면 사람의 역사이기도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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